B2B 제품 디자인은 늘 이상적인 환경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고객을 직접 만나기 어렵고, 오래된 레거시 시스템 위에서 개선해야 하며, 조직 안에서 디자인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도 많습니다.
"최윤정"님은 그런 제약된 환경 안에서 내부 운영자를 사용자 이해의 접점으로 삼고, 디자인 시스템을 통해 팀의 기준을 만들어온 B2B 프로덕트 디자이너입니다

이번 글은 화면을 예쁘게 만드는 일을 넘어, "업무 흐름과 데이터 구조를 읽으며 제품을 설계해온 한 디자이너의 기록"입니다.


1. B2B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일반적인 화면 디자인보다 업무 흐름이나 데이터 구조를 더 중요하게 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전형적인 B2B 구조 안에서 일했어요. 고객과의 접점은 제한되어 있고, 자유롭게 문제를 실험하는 문화도 없는 곳이었어요. 처음엔 답답했죠. 고객의 문제를 직접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찾은 방법은 내부 운영자를 중간 접점으로 삼는 것이었어요. 고객사와 직접 컨택하는 내부 운영자분들을 꾸준히 만나며, 고객이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 들었어요. 그분들 자체도 저희 제품을 사용하는 주 고객이었기 때문에, 인터뷰를 통해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어요.

작업한 제품은 "오래된 레거시가 있는 ERP"였어요. 요즘 B2B 제품과는 거리가 있었죠. 표면에서 보이는 문제들을 먼저 리스트업하고, 인터뷰를 통해 개선의 방향성을 잡아갔어요. 레거시 제품의 특성상 크게 바꾸면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했어요. 피드백이 없는 UI, 무너진 버튼 위계처럼 최신 B2B 제품에서는 당연한 사용성 기준들을 하나씩 개선하는 방식으로요.

회사를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해결해주더라고요. 그렇게 진행한 프로젝트는 안정적으로 출시됐고, 고객사에서도 사용성 문제를 치명적으로 느끼지 않으셨어요. 직접 못 만나도, 사용자를 이해하는 방법은 있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2.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제품 출시 기간을 줄이는 과정에서, 디자이너가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입사하고 나서 문제가 바로 보였어요. "디자이너 없이 출시된 제품들"이 있었거든요. 개발자가 직접 만든 전형적인 B2B 제품의 모습이었죠. 사용성은 무너져 있었고, 앞으로 3~4개의 제품과 인터널 툴을 더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기존 제품의 출시 기간을 내부 직원분께 여쭤봤더니, 대략 2년이 걸렸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숫자를 듣고 나서 확신했어요. 균일한 서비스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속도를 내려면, 디자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요.

처음 팀을 설득하는 건 어려웠어요. 디자인 시스템 자체를 모르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그래서 먼저 디자인 시스템 경험이 있는 개발자분 한 분을 찾아갔어요. 공감을 얻고 나서, 팀 전체에 선언했어요. "앞으로의 디자인은 모두 디자인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이걸 확장성 있게 적용하겠다"고요. 돌이켜보면 무리수를 둔 것도 있어요. 그래도 팀의 업무 질과 제품 퀄리티를 높일 수 있다면,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결과적으로 "제품 출시 기간은 6개월로 줄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개발자분들이 개발 전에 디자인 시스템을 먼저 확인하는 게 팀의 룰이 됐어요. 저도 새 컴포넌트를 추가할 때마다 반드시 소통하며 작업하는 게 루틴이 됐고요.

다만 디자인 시스템이 모든 팀에 맞는 건 아니에요. 매번 새로운 아트적인 디자인을 만들어야 하는 조직이라면 오히려 제약이 될 수 있어요. 디자인 시스템의 가장 큰 가치는 규칙과 약속을 팀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에 있어요. 컴포넌트보다 먼저 정리해야 하는 건, 결국 팀이 같은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3. AI가 제품 디자인 업무에 들어오면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거라고 보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AI로 인해 프로덕트 조직이 더 날개를 달 것 같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하나의 기능을 제안하려고 해도 "디자인 → 정책 정리 → 프로토타입 → 합의 → 수정"의 사이클을 반복해야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나의 가설이 생기면, AI와 대화하면서 바로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요. 열 마디 말보다 하나의 시각적인 자료가 팀의 합의를 훨씬 빨리 이끌어내거든요. 이 중간 과정이 단축된다는 게 정말 크다고 느꼈어요.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중간은 빨라졌지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앞단은 오히려 더 뾰족해져야 해요. 

내가 어떤 문제를 풀고 싶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AI와의 대화도 의미 있어지거든요. 

저도 어떤 날은 하루 넘게 잡고 있고, 어떤 날은 20~30분 만에 도출하기도 해요. 흔히 AI를 '딸깍'이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딸깍이에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수많은 딸깍을 경험해야 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틀려도 괜찮다는 멘탈도 필요하고요.

결국 AI 시대에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솔버이자 설계자예요. 

고객에 대한 마음, 불편함을 없애주고 싶다는 따뜻함 이건 AI가 대신해줄 수 없어요.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멀지 않은 미래도 그렇게 무섭지 않다고 생각해요.

고객을 직접 만날 수 없어도, 사용자를 이해하려는 방법은 존재합니다. 제약된 구조 안에서 접점을 찾고, 팀을 설득하고, 조금씩 기준을 만들어온 저의 이야기는 B2B 디자인의 현실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준거 같아요. AI가 중간 과정을 빠르게 만드는 시대일수록, 문제의 본질을 뾰족하게 바라보는 눈이 더 중요해질 것같아요


AI가 프로토타입과 중간 과정을 빠르게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누구의 불편을 줄여야 하는지, 팀이 어떤 기준으로 함께 움직여야 하는지는 여전히 사람이 결정해야 합니다.

최윤정님의 이야기는 B2B 디자인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고객을 직접 만나지 못해도 사용자를 이해하는 방법은 있고, 작은 기준을 쌓아가면 팀의 일하는 방식도 바뀔 수 있습니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디자이너에게 더 중요해지는 것은 결국 "문제를 뾰족하게 바라보는 눈"입니다.